그러나 그가 타고나길 눈물이 많은 것은 사실이었다. 조영은 아마 그가 제 앞에서 처음 울던 날 눈물샘이 펑 터져버린 이후로 아직 그대로인 것 아닌가 짐작했다. 도대체 지금까지 어떻게 참고 산 걸까. 그는 이제 동화책을 읽고도 눈시울을 붉혔다. 대부분은 감동해서, 드물게는 분노해서였다. 분노의 예로 플란다스의 개가 있었다. 그는 그것을 읽고 완벽한 디스토피아라며 치를 떨었다. 열망했던 루벤스의 그림을 보고 그 아래서 파트라슈와 같이 얼어죽은 넬로는 빌어먹을 호상이냐며 신랄하게 혹평했다. 어떻게 이런 잔인한 이야기가 동화로 분류될 수 있느냐며 이런 걸 아이들에게 읽으라고 던져주는 건 무슨 정신이냐고 광분했다. 조영은 고개를 주억거렸다. 일정 부분 동의했다. 개는 좀 살렸어야 하지 않나. 말년 빼곡히 우유 수레나 끌고 살았는데. 어쩌면 그 늙은 개에게는 넬로의 할아버지를 만나기 전 길에서의 방랑이 더 나았을 수도 있다. 조영의 생각은 대개 그러했으므로 입 밖으로 뱉지 않았다. 눈가가 빨개져 있는 그의 가슴에 기름을 붓고 싶지 않았다. 그 정도의 눈치는 있었다. 그러나 그 이상으로 그를 분노케 한 동화는 따로 있었다. 왕자의 사랑을 얻지 못해서, 그를 구한 게 자신이었다는 걸 밝히지도 못한 채 또 한 번 그를 살리려 물거품을 택해버린 여인의 기구한 생을 그는 연민했다. 알려줬어야지. 왕자를 구한 게 자신이었다고 어떻게든 밝혔어야지. 이렇게 허망하게 죽어버리면 어떡해. 이렇게 불쌍하기만 해서 어떡하냐고. 젖은 눈가를 손수건으로 찍어내는 그를 조영은 최선을 다해 위로했다.